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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리자료

영신대...우천 허만수,

영신대...우천 허만수,

 

 

지난 6월 29일 지리산 의신에서 시작하여 큰세게골을 거쳐 영신대,창불대로 올라

음양수,대성골 의신으로 내려서는 원점회귀산행을 한 후 늦게나마 산행기를 작성하려 영신대에 관한 자료를 조사하다,

작년 10월에 장안산에서 심근경색으로 소천하여 지금은 저 하늘에서 영면을 취하며 주유천하하고 있을

나의 벗 '숯댕이눈썹'이 귀한 자료를 올려놓은 것을 발견하고 반가운 마음에 빌려왔습니다.

 

 

숯댕아,작년 이 맘때에는 너하고 폭포 본다고 돌아댕겼는데...

너무 그립구나 친구야...!!

 

 

 

 

     '영신대'

 

 

 

 

     '창불대'

 

 

'지리산 산신령' 우천 허만수 (상)

 

 

 

 

 지리산 칠선계곡 칠선폭포

 

 

 

 

 

 

필자가 1980년대 중반 처음으로 칠선계곡을 찾게 된 것은

우천 허만수(宇天 許萬壽) 선생의 족적을 더듬어보기 위해서였습니다.

당시 칠선계곡은 이정표 하나 없는 것은 물론,

길이 불분명하여 길 안내자는 머리가 빙빙 돌 지경이라고 말하고는 했지요.

모든 것이 불비했던 그 시절에는 칠선계곡에 발을 들여놓는다는 자체가

어렵고 힘든 노릇이었어요.

 

칠선계곡을 답파하려면 우선 산길을 걷는 훈련은 물론,

체력을 다지는 것부터 선행돼야 한다는 것이 산악 선배들의 말이었습니다.

그래서 칠선계곡 답파에 앞서 주능선 종주 등을 여러 차례 하기도 했었지요.

그런 뒤 칠선계곡 답파에 나섰는데,

로타리산장에서 한밤중에 출발하여

천왕봉을 거쳐 당일로 하산하는 시간계획을 세웠답니다.

 

 

우천 허만수는 누구인가?

왜 그이 때문에 칠선계곡을 찾지 않으면 안 되었던가?

그 해답은 중산리계곡 두류교 옆 천왕봉 등산구의 자연암석 위에 세워놓은

그이의 추모비에 씌어 있습니다.

'산을 위해 태어난 산사람 우천 허만수 추모비'

그 비석 뒷면에는 그이의 지리산 행적과 산사람으로서의 면모를 소상하게 적어 놓았어요.

 

이 비문은 참으로 명문으로 구절구절 감동이 한 아름씩 넘쳐납니다.

그이를 어째서 세상 사람들이 지리산 최초의 '인간 산신령'

또는 '지리산 산신령'이라고 부르는지 능히 짐작하게 해주거든요.

특히 필자의 눈을 사로잡은 것은 그 비문의 마지막 구절이었어요.

 

 

[..그런데 어찌된 일이랴,

님은 1976년 6월 홀연히 산에서 그 모습을 감추었으니

지리 영봉 그 천고의 신비에 하나로 통했음인가?

가까운 이들과 따님 덕임의 말을 들으면 숨을 거둔 곳이 칠선계곡일 것이라고 하는 바,

마지막 님의 모습이 6월 계곡의 철쭉빛으로 피어오르는 듯하다.]

 

 

바로 이 대목이예요.

'님의 정신과 행적을 본받고자 이 자리에 돌 하나 세워

오래 그 뜻을 이어가려 하는 바이다' 라고 끝맺은 이 비문에서

우천의 최후를 언급한 대목은 좀체 풀리지 않는 미스테리였습니다.

 

칠선계곡이 얼마나 아름다우면 인간 산신령의 영원한 안식처가 된다는 것일까요.

 

우천이 최후의 원시림지대인 칠선계곡에서 아무런 흔적도 남겨놓지 않은 채

증발했을 것으로 추측하는 데는 나름대로의 이유가 있었답니다.

추모비문에 쓰인대로 그이와 가까왔던 사람들과

따님의 증언을 근거로 하고 있는 것이었어요.

하지만 그 증언이란 '평소에 허만수로부터 들었던 이야기'에 근거하는

추상적인 추론에 지나지 않는 것이기도 하지요.

 

 

지리산의 '인간 산신령' 우천 허만수는 1976년 6월 홀연히 종적을 감추었답니다.

그이는 아무런 흔적도 남겨놓지 않고 사라져버렸어요.

그 이후 아무도 그이의 모습을 보지 못했다는 군요.

그가 어디서 어떻게 최후를 맞이했는지는 아무도 알지 못합니다.

 

그런데도 '칠선계곡에서 숨을 거두었을 것'이라고 추모비문에까지 씌어 있지요.

어째서일까요?

그이는 가족을 버리고 지리산에 입산하여 30년 가까이 짐승처럼 야생했답니다.

그이는 평소 가까운 친척이나 딸에게 자신은 최후의 모습을 보여주지 않고

증발할 것이라고 말했다고 하더군요.

살아있을 때처럼 죽은 뒤에도 어떠한 부담도 주지 않으려고 한 것이지요.

 

그이는 지리산 가운데 칠선계곡의 자연세계가 가장 마음에 들었다고 말하고는 했어요.

허만수님은 그 칠선계곡의 원시 자연세계에 동화하고 싶은 자신의 마음을

가끔씩 내비치고는 했었다는 거예요.

원시세계에서 태고의 이끼처럼, 풋풋한 나뭇잎,

또는 돌이나 흙처럼 자연의 한 구성 분자로 동화하고 싶어했다는 것입니다.

 

 지리산 중산리 초입에 세워진 우천 허만수 추모비

 

 

 

 

천왕봉 등산구의 우천 허만수 추모비가 주는 여운이 필자에게는

가슴 깊숙한 곳에서 소용돌이를 일으키게 하는 듯했어요.

 

'칠선계곡에서 지리영봉, 그 천고의 신비에 하나로 통했을 것'이라고 했으니...!

 

우천 허만수님은 칠선계곡에서 증발한 것이 아니라,

태고의 신비와 하나로 통하여 영생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하고 자문해보기도 했답니다.

 

지리산에서 30년을 야생(野生)한 산사람이 지리산의 가장 이상적인 것으로

'칠선계곡의 적요'를 꼽았다고 하지 않습니까.

그렇습니다.

그이는 칠선계곡의 원시 자연세계에 동화하고자 한 것이 분명합니다.

그이는 평소 가까운 이들에게 그런 말을 넌지시 비치고는 했다니까요.

말이 씨가 된다고도 하지 않습니까.

 

 

필자가 첫번째 칠선계곡을 찾았을 때는 계곡 주변에 '그럴듯한 동굴'이 없을까 하고

시종 좌우를 살펴보고는 했었답니다.

우천의 행방에 대해 집착을 보이자 가까운 주위 산악인들이 이렇게 말하고는 했지요.

"우천은 자연 동굴 같은 곳을 자신의 유택으로 미리 마련해놓았을 법하다."

칠선계곡 어디엔가 자신이 편안하게 영면할 수 있는

영원한 안식처를 마련해 두었을 것이라고 말하는 것이었어요.

 

실제 우천 허만수님은 생전에 가까운 이들에게 아무도 모르게

증발할 것이라고 말하고는 했었다네요.

자신이 사라지고 없을 때는 찾지를 말라고 했답니다.

칠선계곡 어디에선가 자연에 동화돼 있을 것이라고요.

사후 자신의 시신을 거두는 것마저 누구에게도 신세를 지지 않으려 한 것이지요.

 

산길을 따라 내려가면서 주위를 이리저리 둘러본다고 하여

칠선계곡의 오묘한 자연세계를 겉모습이나 제대로 알기나 하겠습니까?

깊은 자연의 속살은 아예 필자의 눈에는 비치지도 않겠지요.

허만수님이 은신했을 법한 자연 동굴을 찾아보겠다고 생각한 것이 잘못이겠지요.

산길을 따라 칠선계곡을 다 내려갔지만, 동굴과 같은 곳은 눈에 띄지 않았답니다.

 

 

'지리산 산신령'으로까지 불린 우천 허만수님은 누구인가?

그이를 기리는 추모비문은 '지리산 산신령'의 남다른 면모를 이렇게 설명해줍니다.

 

[님은 평소에 "변함없는 산의 존엄성은 우리로 하여금 바른 인생관을 낳게 한다"고 말한대로

몸에 배인 산악인으로서의 모범을 보여주었으니,

풀 한 포기, 돌 하나 훼손되는 것을 안타까워 한 일이나,

산짐승을 잡아가는 사람에게 돈을 주고 되돌려받아

방생 또는 매장한 일이 이를 뒷받침해준다.]

 

 

'허만수 추모비' 비문은 1916년생인 그이가 '40여세에 지리산에 들어가

가없는 신비에 기대 지내며...' 라고 적고 있습니다.

따라서 그이는 50년대 후반, 빨치산이 평정된 직후에 세석고원으로 올라가

토담집을 마련한 것으로 짐작됩니다.

그이는 지리산에 들기에 앞서 의령 자굴산 토굴에서 2년여를 보냈다고 하지요.

 

 

1961년 광주 조선대학교 약학과 1학년 학생 13명은 여름방학을 맞이하여

지리산 세석고원에 올랐다네요.

안학수 지도교수 인솔로 지리산의 약용식물 채집과 조사에 나선 것이었답니다.

그들은 우천 허만수님의 초막에서 잠을 자게 되었답니다.

그들 학생 가운데 한 명인 노금모님이 당시 세석고원의 우천 초막 사진을 들고

필자를 찾아왔어요.

1989년, 필자가 지리산 이야기를 신문에 연재하던 <지리산 365일>에

우천의 행적을 언급하고 있을 때였습니다.

 

 세석에 있었던 우천 허만수님의 초막...1961년....

 

 

 

 

'지리산 산신령' 또는 '인간 산신령'으로 불리는 우천 허만수님.

그이가 살았던 세석고원의 '토담집 한 채'의 모습을

필자의 고교 선배이자 신문사 선배인 이종길님의 <지리 영봉>은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습니다.

 

[세석산장이 없었을 때는 그 자리에 토담집 한 채가 있었다.

어느 시골집의 헛간 같았던 그곳이 허만수씨의 보금자리였다.

허씨는 그 토담집에서 흘러가는 구름, 피고 지는 고산식물들의 꽃,

속삭이는 솔바람을 벗삼고 살았다.

인정 많은 등산객이라도 찾아들지 않으면 나무 열매, 산나물로 배를 채우며 살았다.

그러나 허씨는 세상에 이 생활보다 더 좋은 것이 없다고 말했다.]

 

 

지난 1950년대 중반부터 70년대까지 지리산을 찾은 등산객들은 거의 누구나

우천과 크고 작은 인연을 맺었거나, 그로부터 깊은 인상을 받았을 것입니다.

그이는 세석고원 뿐만아니라 천왕봉과 거림골 등을 비호처럼 날아다녀

그이의 발길이 닿지 않는 곳이 없다시피 했으니까요.

지리산의 조난사고 현장에는 언제나 그가 번개처럼 나타나 도움을 베풀었고,

멋모르고 지리산에 오른 사람들에게는 그의 움막이 안전한 대피소 역할을 했다네요.

 

 

1961년 지리산의 약용식물 채집에 나섰던 조선대학 약학과 학생 13명.

그들은 변변한 야영장비도 없이 해발 1600미터의 세석고원에 올랐지만

허만수님의 초막 덕분에 아무런 어려움도 겪지 않았답니다.

그들 학생 가운데 한 명인 노금모님은

우천 초막집의 모습을 사진으로 찍어 지금까지 간직해온 것이지요.

 

흑백사진은 아주 인상적입니다.

움막의 지붕은 억새풀로 덮여있고, 벽체는 나무들을 잘라 차곡차곡 쌓아올렸어요.

축담 하나 없고, 마당도 없습니다.

허름하기 짝이없지만, 집 주변의 자연 훼손이 거의 없어요.

산중의 한 자연세계마냥 자리합니다.

 

노금모님은 초막 주인 허만수님에 대해 특별히 깊은 감명을 받았고,

세석고원에 체류하는 동안 즐거움도 컸었다고 하더군요.

그래서 그이는 그 다음해인 62년에 친구 한 명과 함께

다시 세석고원의 우천 움막을 찾아갔답니다.

 

다음은 노금모님의 증언입니다.

 

"허만수 선생님은 1년만에 다시 찾아간 우리들을 따뜻하게 맞이해 주더군요.

그이는 밤이 깊도록 여러 가지 재미있는 산 이야기를 많이 들려주었어요.

특히 통천문에 나무사다리를 만든 이야기며,

교사로 근무하고 있다는 따님 얘기도 들려주었습니다.

그 때는 선생님이 술도 많이 마시지 않는 것 같았어요.

아주 밝은 얼굴 모습이었거던요."

 

 

조선대학교 약학과 학생들이 세석고원을 찾았던 바로 그 해인 1961년 8월1일에는

지리산 일원에 강력한 태풍인 너러호가 엄습했어요.

당시 부산에서 지리산 등반에 나섰던 언론인 김경렬 일행 24명은

산중에서 비상탈출을 시도했답니다.

그러나 일행 가운데 예닐곱명이 낙오되어 다시 수색대가 출동하는 소동을 빚었어요.

수색대는 가까스로 낙오자들을 찾아내 세석고원의 허만수님 초막으로 대피시켰습니다.

 

그 때의 상황을 훗날 김경렬님은 다음과 같이 들려주더군요.

 

"허만수 초막에서 사흘 밤낮을 갇혀 있는 동안 2명의 환자가 발생했다.

우리 일행은 겨우 정신을 가다듬고 허만수의 안내를 받아 하산을 시도했다.

우리는 계곡을 피해 거림골의 왼쪽 산 능선을 타고 내려갔다.

하지만 그쪽에도 곳곳에 계곡이 길을 막았다.

그때마다 우리는 우천의 도움으로 계곡을 건넜다.

마지막으로 곡점의 큰 하천 격류를 만났는데,

우리 자신의 능력으로는 도하가 불가능했다.

허만수가 자일을 설치하고 한 사람 한 사람씩 건널 수 있게 해주었다.

그이의 그 때 그 도움은 언제까지나 잊지 못할 것이다."

 

 

 

 

 

'지리산 산신령' 우천 허만수 (하)

 

'지리산 산신령'으로까지 불리는 우천 허만수님은 어떤 인물일까요?

 

그이의 남다른 발자취는 지금도 많은 사람들의 화제가 되고 있지요.

그이를 지극히 존경하는 또 한 사람의 `지리산 도사'인

`산에 미친 사람' 성락건님은 지금도 그이의 유해를 찾기 위한

수색작업을 벌이고 있을 정도이니까요.

 

 

우천 허만수님은 1916년 경남 진주시 옥봉동에서 태어났는데,

일찍 일본에 유학을 갔을 만큼 좋은 가문에서 성장했지요.

그이는 일본 입명관(立命館) 중학 시절에 산과 첫 인연을 맺게 됩니다.

그 학교에는 '동정(童貞)클럽'이라는 등산반이 있었는데,

회원 전체가 산을 즐기되 여자를 가까이 하지 않는다는 색다른 규칙이 있었다네요.

 

 

허만수님은 이 '동정클럽'에 가입하고부터 본격적인 등산을 사작하게 되었어요.

그이는 산에 미쳐 대학 진학도 안중에 없었나 봅니다.

더 중요한 사실은 '동정클럽'의 그 규칙 때문에 여자도 가족도 내팽개친 채

지리산으로 들어가 야생의 생활로 일관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하네요.

 

 

그런데 우천의 부모는 산에 미친 아들의 마음을 돌리기 위해 비상수단을 강구했지요.

그것이 바로 결혼을 시키는 것이었어요.

22세가 된 허만수를 일시적으로 강제 귀국시켜 강제 결혼을 시켰답니다.

그이는 부인을 데리고 일본으로 건너가 교또 전문학교를 졸업했어요.

 

 

허만수님은 나이 29세 때 해방을 맞게 돼 일가족이 귀국했답니다.

부인과 딸 셋을 데리고 고향에 돌아온 그이는 진주시에서 '대동'이란 서점을 냈어요.

하지만 산에 이미 정신이 팔린 그이가 서점을 제대로 꾸려갈 수가 없었지요.

2년만에 서점 문을 닫은 그이는 차라리 홀가분해진 마음으로

가족을 내팽개친 채 산을 찾기 시작했답니다.

 

 

허만수님은 31세 때 산을 잊어달라는 부인의 애원도 뿌리치고 영영 집을 떠납니다.

집을 나선 그이가 처음 찾은 곳은 의령 자굴산이었어요.

자굴산 정상 부근에 땅굴을 파고 그는 원시인과 다름없는 산생활을 시작한 것이지요.

이렇게 자굴산에서 2년여의 세월을 보냈답니다.

 

 

그 다음으로 옮긴 곳이 바로 지리산 세석고원 이었다네요.

고원 한편에 토막집을 짓고 본격적인 야생 생활을 하게 된 것이지요.

 

그이가 집을 나선 지 4년째가 되던 어느 무더운 여름날,

부인이 이 세석고원의 토막집을 찾아왔어요.

부인은 사흘 동안 남편에게 집으로 돌아가자고 애원했답니다.

 

하지만 우천 허만수는 집으로 돌아가는 것을 완강하게 거부했습니다.

"나는 이미 산에 미친 사람이니 단념하라"는 것이었지요.

결국 부인은 하산 설득을 포기하고 홀로 집으로 돌아가는 수밖에 없었답니다.

(이상 허만수님의 발자취는 이종길 지음 '지리영봉'에

이미 소개한 것 가운데 발췌한 것입니다.)

 

 

사진으로 전하는 우천 허만수님의 모습은 1961년 태풍 너로호 내습 때

부산의 언론인 김경렬님이 하천 도하 도움을 받으면서 촬영한 것이 있지요.

그런데 필자에게 우천 선생의 모습을 가장 생생하게 촬영한 사진을 제공한 이는

진주 경상대학교에 근무하는 홍성국님입니다.

홍성국님은 1974년 2월 세석산장 앞에서 허만수님과 나란히 서서 기념촬영을 했는데,

바로 그 사진입니다.

 

 1974년 세석산장에서 우천 허만수님

 

 

 

 

 

우천이 모습을 감춘 것은 그로부터 2년이 더 지난 1976년 6월입니다.

필자의 대하르포 <지리산 1994>, 또는 분책 <지리산>에 이 사진이 실려 있습니다.

아마도 이 사진이 우천 허만수님의 최후의 사진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어요.

그런데 이 사진을 촬영한 그해 12월18일, 필자는 법계사 초막에서 하룻밤을 묵게 됐는데,

그 때 밥을 지어주던 이가 바로 우천 허만수님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을

지금도 뇌리에서 지우지 못하고 있답니다.

 

 

 

 

1960년대는 전란이 평정된 이후의 지리산 등산 초기였지요.

이 시기에 지리산 산행에 나선 '등산 선각자'(?)들은 결코 많은 숫자가 아니었지요.

그들은 대개 유명 의사나 체육인, 학자 등이었어요.

당시의 지리산 등산은 경상도 쪽은 천왕봉과 세석고원 정도로 압축돼 있었답니다.

 

 

이 동부지리산권을 찾았던 소수의 등산 선각자들.

그 때의 지리산 등산은 지금과 견주면 어떤 의미에서 동화세계와 같은 측면이 있습니다.

그들은 지리산중의 아주 특별한 사람들을 만나 특별한 산정을 나누었던 것이지요.

 

법계사 초막(草幕)과 천왕봉, 세석고원이 그 때의 지리산 등산의 주요 거점이었는데,

이 세 곳에는 제마다 터줏대감이 자리잡고 있었어요.

 

 

세석고원 움막의 우천 허만수,

법계사 초막의 손청화 보살,

천왕봉 토굴의 김순룡 노인이 바로 그 주인공들입니다.

 

천왕봉 남쪽의 법계사도 6.25 전란 와중에 불타버렸어요.

이 사찰 복원을 하겠다고 나서 사찰 터에

조그만 초막을 지어놓고 지키고 있던 이가 손보살이었지요.

 

또 천왕봉에는 빨치산 등이 이용한 반지하식 토굴이 있었는데,

전란 직후 제빨리 이 토굴을 차지하고 산장처럼 이용한 이가

진주 출산의 김순룡 노인이었어요.

 

 

이 가운데 등산객의 절대적인 사랑을 받았던 곳이 법계사 초막입니다.

부산 대륙산악회의 성산씨 등은 법계사 초막에서

손보살이 내주는 팔선주를 마시는 것을 최고의 기쁨으로 생각할 정도였어요.

손보살은 지리산을 찾는 부산, 경남 유지급 인사들에게

법계사 복원불사 시주금을 받아내고자 더욱 친절을 베풀었음직합니다.

어쨌든 모든 것이 불비했던 당시 법계사 초막은 아주 특별한 산장 역할을 한 셈이었어요.

 

 

허우천, 손보살, 김순룡 노인은 서로 낯을 돌리고 남처럼 지낸 것은 결코 아니었답니다.

거리적으로는 꽤 떨어져 있었지만,

사실은 세 사람이 서로 협력 체제로 함께 지냈던 것이나 다를 바가 없었어요.

 

손보살이 법계사 초막을 비울 때는 허우천이 와서 지켜주기도 하고,

천왕봉에 사람이 없을 때는 김 노인 또한 법계사 초막에 묵기도 했어요.

특히 손보살은 허우천이 들리면 한가족처럼 밥과 술을 대접했습니다.

 

 

허우천에게 푸근한 인정을 베푼 곳은 곡점마을의 유일한 민박집이자 국밥집이 또 있었어요.

당시에는 노선버스의 종점이 이곳이었는데,

국밥집 주인은 이광덕 조순례 부부였다고 합니다.

큰 가마솥에 종일토록 장작불을 지펴 끓여내는 이 집의 국밥 맛은 천하일미였다고 하네요.

이 집 안주인은 진주 태생의 미인으로 지리산을 닮아 인정도 많았다고 합니다.

 

국밥집 안주인은 세석고원에서 짐승처럼 야생하는 허우천을 끔찍이도 생각했답니다.

그녀는 그가 한번 찾아오면 며칠씩이나 붙들어두고 '영양보충'을 시켰다고 합니다.

허우천은 천성이 나무나 풀과 같아서 먹을 것이 없으면 그냥 굶고,

술이 있을 때는 몇 날 며칠이고 술만 마셔 건강을 잃고 있을 때가 많았다고 하지요.

곡점의 국밥집은 우천의 허기진 배를 언제든지 한껏 채워주었던 거에요.

 

허우천은 국밥집에서 국밥과 막걸리로 배를 든든하게 채우면

그 길로 걸어서 진주까지 다녀오고는 했습니다.

진주에선 주로 친구의 책가게나 다방에서 가까운 사람들과 만났어요.

또 따님을 살짝 만났다는 얘기도 전해집니다.

이 사실은 허만수님이 결코 유별난 사람이 아니라 따뜻한 인간애를 소중하게 생각했던

보편적인 인간이었음을 증명해주는 것이기도 하지요.

 

 

필자가 선배 사진기자와 함께 천왕봉 취재에 나선 길에 법계사 초막에 들린 것이

1974년 12월18일이었다고 했습니다.

초막에는 손보살 대신 키가 크고 수염이 더부룩한 한 남정네가 있었어요.

그 사나이는 우리에게 저녁식사를 내주고 따뜻한 잠자리도 제공해주더군요.

다음날 아침 고맙다는 인사를 하고 그냥 헤어졌는데,

그로부터 많은 세월이 흐른 뒤 필자는 그 남정네가 우천 허만수님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을 불현듯 하게 됐어요.

 

 

 

[그런데 어찌 된 일이랴,

님은 1976년 6월 홀연히 산에서 그 모습을 감추었으니

지리 영봉 그 하나의 신비에 통했음인가?

가까운 이들과 따님 덕임의 말을 들으면,

숨을 거둔 곳이 칠선계곡일 것이라고 하는 바,

마지막 님의 모습이 6월 계곡의 철쭉빛으로 피어오르는 듯하다.

...님의 정신과 행적을 본받고자

이 자리에 돌 하나 세워 오래 그 뜻을 이어가려 하는 바이다.]

 

 

중산리의 천왕봉 등산구 자연석에 세워진 추모비에는

우천 허만수님이 칠선계곡에서 지리영봉,

그 천고의 신비에 하나로 통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허우천의 최후에 대한 이러한 결론은 평소 그이의 행적과 삶의 자세와 견주어보면

당연한 결론일 것으로 생각이 됩니다.

그이의 정신세계는 이미 지리산의 정기와 하나로 통하고 있었던 것이 분명하니까요.

 

 

필자는 80년대 후반, 허우천의 흔적에 대한 어떤 미련을 떨치지 못해

두번째 칠선계곡 답사에 나섰습니다.

마폭 조금 아래 쪽에서 필자는 놀라운 광경을 목격하게 됐어요.

우리 일행은 등산로를 따라 하산하는 데도 아주 힘이 들었지요.

그런데 온통 바위 투성이인 험준한 계곡 한 가운데로 한 사나이가

거침없이 걸어가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칠선계곡이 어떠합니까?

집채 같은 석실이 가로막고 있는가 하면,

폭포와 징담, 칼날처럼 날카로운 직벽 등이 예사롭지가 않지요.

그 계곡을 한 발자국도 밖으로 벗어나지 않고 계속 따라간다는 것은

너무나 놀라운 일이었어요.

그 사나이의 모습이 필자의 눈에는 마치 계곡의 수면 위로 사뿐사뿐

날아가는 것처럼 보였답니다.

"아, 사람이 아니라 신선이로고! 저이가 바로 허우천이 아닌가!?"

 

필자는 한동안 경탄하는 마음으로 계곡길을 거슬러내려온 뒤에야 그 사나이를 만났어요.

가까이서 보니 그이는 20대 젊은이였답니다.

그이는 부산에서 첫차로 중산리에 닿아 천왕봉에 오른 뒤

칠선계곡으로 하산한다고 말하는 것이었어요.

우리 일행은 하루 앞날 치밭목에 올라 아침에 산장에서 출발했는데...

놀라지 않을 수 없었어요.

그 젊은이의 초인적인 산행능력은 마치

우천 허만수님의 한 면모를 대신 보여주는 것으로 여겨졌답니다.

 

 

몇 해 전, 필자는 지리산에 정주한 '지리산의 달인' 성락건님을

그이의 집으로 찾아가서 만났어요.

그런데 그이로부터 우천과 관련한 뜻밖의 얘기를 들었답니다.

성락건님은 오직 그이 혼자의 의지로 우천의 시신(유해)이나 흔적을 찾기 위해,

누구도 할 수 없는 아주 특별한 수색작업을 벌인 것이었어요.

그 방법도 특출했지만, 그 장소 또한 필자로선 아주 의외의 곳이었답니다.

 

성락건님은 먼저 우천이 증발한 곳은 칠선계곡이 아니라 세석고원과 인접한

영신대(靈神臺)로 굳게 믿고 있는 것이었어요.

그이는 영신대 제단에 텐트를 설치해놓고 야영을 하면서

주변 일대의 험준한 바위 벼랑을 촘촘하게 가로 세로 10미터 간격으로

씨줄 날줄을 긋듯이 자일을 타고 수색을 했다는 거에요.

열흘 이상을 마치 바둑판 눈금 긋듯이 그렇게 정밀 수색작업을 한 것은

영신대에서 우천의 결정적 흔적을 수습할 수 있을 것으로 믿은 때문이지요.

 

성락건님은 '지리산의 달인'입니다.

'산에 미친 사나이'인 그이가 그토록 좋아하는 지리산에 자신의 오두막

'나무 달마 살래'를 지어놓고 나무를 닮아 사는 사람이지요.

그이의 얘기를 들어보면 참으로 경탄하지 않을 수 없어요.

그이는 지리산을 3차원의 세계로 보고 있는 거예요.

그이가 지리산에 '청학동(靑鶴洞)'의 실체를 믿고 있는 것도

그 3차원적 인식에 바탕을 두고 있는 것입니다.

 

성락건님이 어째서 우천의 흔적을 찾아

그 누구도 생각조차 할 수 없는 작업(?)을 했던 것일까요?

'지리산의 달인'이 '지리산 산신령'을 가장 존경하고 있는 때문이랍니다.

 

 

 

‘지리산의 달인’ 성락건님이 우천 허만수님의 유해를 칠선계곡이 아닌

영신대에서 찾겠다고 말하는 것에서 필자는 신선한 충격을 받았습니다.

 

그렇습니다,

지리산중에 특별한 곳이 어디 칠선계곡뿐이겠습니까.

영신대(靈神臺)라면 지리산에서 가장 신령스런 영험한 곳으로 이름이 난 곳이지요.

무엇보다 허만수님의 움막이 자리했던 세석고원과 바로 지척의 거리에 자리합니다.

‘지리산 산신령’으로 불렸던 우천이었으니,

그이가 영신대에서 영면했을 가능성도 높다고 하겠지요.

 

 지리산 영신대

 

 

 

 

 

흔히 보는 일이지만 우리들은 때로 어떤 선입견으로 무슨 일을 쉽게 단정하고는 합니다.

우천 허만수님이 칠선계곡에서 아무도 모르게 종적을 감추겠다고

말을 한 것이 사실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추모비석에까지 그이가 숨을 거둔 장소로 칠선계곡을 지목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이가 실제로 칠선계곡에서 최후를 마쳤는지는 전혀 알 수가 없는 일이지요.

 

원래 유명인사에게는 많은 말이 따르기 마련이지요.

 

허만수님에게도 여러 얘기가 따라다녔는데,

축지법을 써서 진주까지 단숨에 다녀온다던가, 힘이 천하장사라는 등

그럴 듯하게 꾸며대는 ‘스토리’들이 있었어요.

 

또한 아무 근거도 없는 소문이나 루머가 떠돌기도 했었지요.

하지만 어디에서 어디까지가 사실인지 그것이 문제가 되더군요.

 

 

우천의 생애를 추적하던 필자는 그이가 종적을 감추기 직전의 상황이

퍽 좋지 못했다는 사실을 ‘지리산의 선구자’들로부터 확인하고 충격을 받았어요.

 

노고단산장의 함태식, 로타리산장의 조재영님 등은

한결같이 ‘우천의 말년’이 아주 불행했다고 증언하더군요.

 

우천은 늘 술에 취해 있었고, 정신을 가누지 못할 때도 있었다고 했습니다.

 

당시 세석고원을 비롯한 지리산 일대에는 분위기가 험악한 경우가 많았다고 합니다.

도벌꾼과 도벌 단속반의 갈등을 비롯,

산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오른 ‘주먹장이’들의

무차별적인 횡포도 빈번하게 빚어졌다는 거에요.

말년의 우천은 술에 취해 있는 경우가 많았는데,

그 때문에 당시의 살벌한 상황과 결부하여 ‘불행한 최후’를 맞이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는 것이었어요.

 

그런데 ‘지리산의 달인’ 성락건님은 우천의 영면 장소를 영신대로 판단하고 있나 봅니다.

그이가 영신대를 샅샅이 뒤진 것도 그 때문이지요.

성락건님의 판단이 옳다면 우천 허만수님은 스스로 생을 행복하게 마감했을 가능성이

높다는 생각이 드는 군요.

세석고원에서 영신대는 바로 지척지간이니,

우천 허만수님은 아무리 술에 취했거나 몸이 불편했다고 하더라도

그곳까지 가는 길이 결코 어렵지는 않았을 거에요.

 

필자는 특히 ‘지리산의 달인’ 성락건님의 판단이라면 전적으로 믿고 따릅니다.

성락건님이 ‘청학동’의 존재를 3차원적으로 보고 말하는 것에서 큰 감동을 받았거던요.

 

 

그렇습니다.

우리는 우주의 오묘한 이치와 진리의 일부나마 어찌 제대로 알기나 하겠습니까.

우천 허만수님은 지리산 청학동을 3차원의 세계로 먼저 찾았고,

성락건님이 뒤를 이어 그 곳을 찾아낼 것으로 필자는 굳게 믿고 기대하고 있답니다.

 

 

[우천 허만수님의 얘기는 여기까지입니다.

그이에 대한 얘기는 아주 많지만,

그러나 확인이 되지 않은 것이 대부분이기도 하지요.

지리산을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그이의 지리산 사랑의 고귀한 정신과 선각자적 업적을 높이 기려야 하겠습니다.

우천 허만수님의 이름이 지리산과 함께 영원할 것으로 믿습니다.]

 

 

 

 

 

 

 

최화수의 지리산이야기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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