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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변이야기

가을맞이 변산 둘러보기

변산국립공원 여행기

 여행기란 제목을 달기에는 조금 남사스러운 감이 있다.

이고장에 살고있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변산,격포를 그저 나들이 장소 정도로 대접을 한다.

도로망이 미천한 옛날에 바닷가에 놀러 간다든가 드라이브를 갈 경우 이쪽 변산반도로 오는 경우가 대부분이라.....

내 경우만 보아도 아마 열댓번은 왔음직하다.

사실 오늘의 외출은 단풍철이 되면 전국의 산님들이 내변산에 모이다 보니 산이 북적북적한 시장이 되기 일쑤라

그전에 내변산 일대 중요 산행로를 탐방하기 위함이었다.

어찌되었든 오랫만에 아내와 둘이 오붓한 나들이를 함께 한 시간이 되었다.

 

 

시원하게 새로 건설한 30번 국도를 타고 부안을거쳐 하서에서 736번 지방도로 바꿔타고 내변산으로 향한다.

 

 

내변산 탐방센터 가려면 중계교를 지나야 한다.부안댐 상류 지역이다.

 

내변산 탐방센터 입구 

좌측으로 가면 가마소 삼거리 방향이고 직진이 직소 폭포를 거쳐 내소사 가는 방향 입니다.

 

인장바위입니다. 가마소 방향에서 보면 코끼리 모양입니다.

 

 

주차비도 입장료도 받지 않으니 입장하는 순간부터 발걸음이 가볍네요.

천왕봉 아래 실상사지 미륵전이 보입니다.

 

실상사지는 실상사라는 절이 있던 터로 원래 실상사는 689년(신문왕 9)에 초의선사(草衣禪師)가 창건하였고,

조선시대 양녕대군(讓寧大君)이 중창하였다고 전해집니다만

1950년 6·25전쟁 때 사찰과 함께 전부 소실되었고 보이는 건물은 근래에 세워진 것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천왕봉이란 봉우리는 지도를 아무리 찾아봐도 보이지 않네요.

선인봉 암릉이 웅장하다.

 

봉래곡입니다.여기서 잠깐 봉래구곡에 대하여 알아 볼까요.

 

제1곡-대소(大沼,大蘇,구시둠벙)-대소폭포를 가르키는 말과 내소사의 유래인 대소래사와 소소래사 중 대소래사를 가르키는 말로

 추정되는데 현재로서는 대소폭포가 제1곡로 자리잡고 있다 한다.

제2곡-직소폭포(直沼瀑布)-폭포밑의 소를 실상용추(實相龍湫)라 하는데 용이 상승한 곳이라는 뜻으로 불경에서 유래되었다.

제3곡-분옥담(噴玉潭)-화산이 폭발한 분화구 모양같다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제4곡-선녀탕(仙女湯)-휘영청 밝은 달밤 선녀들이 내려와 목욕을 하고 간다는 곳.

제5곡-봉래곡(逢萊曲)-"봉래"란 무릉도원과 같은 상상의 산을 이르는 말.그 정도로 봉래구곡중 가장 아름다워서 붙여진 이름이다.

제6곡-영지(影池)-고여있는 물에 월영암의 그림자가 비춰져서 붙여진 이름이다.요즘도 물이 고여있을 때는 월영암의 그림자가 비춰진다고 한다.

제7곡-금강소(金剛沼)-구전되어지는 말에 의하면 금으로 만든 비석을 빠트려 이런 이름이 붙여졌다고 한다.

제8곡-백천(百川)-일대의 모든 계곡이 모이는 장소로 어림잡아 백여개의 천이 모인다하여 붙여진 이름

재9곡-암지(暗池)-봉래구곡의 마지막 곡으로 잠두마을 앞에 있는 연못.

 

 

산정호수 전경 멀리 관음봉이 보인다.

 

호수 전망바위 위에 벌써 가을의 정취가 느껴진다..

 

선녀탕에 계곡물이 없어 을씨년스런 기운이 감돌고

그래서인지 몰라도 선녀는 없었다.

 

직소폭포 전망대와 분옥담

그리고 나의 옆지기

직소폭포 물이 가물어 웅장함이 없다.

여기까지 맛보기로 구경하고 다음 행선지로 가기위해 사자동으로 회귀한다.

 

736번 지방도로를 타고 변산 방면으로 가다보면 남여치에 쌍선봉,월명암 들머리가 나온다.

 

남여치의 유래~남여는 담자(擔子), 두자(兜子), 죽여(竹輿)라고 부르기도 하는 작은 가마이다.

초헌과 비슷한 의자의 양쪽으로 긴 나무가 붙어 있어 앞뒤에서 4명이 어깨에 메고 가도록 되어 있다.

대개 산길과 같은 좁은 길을 갈 때 이용되었다.

이완용이 전라북도 관찰사로 있을때 남여를 타고 서해 낙조를 보기 위해 쌍선봉에 올랐던 것이 유래가 되었다고 한다.

이왕이면 해안도로로 가기위해 고사포 해수욕장으로 방향을 잡았다.

여기서부터 멋있는 해안도로가 펼쳐진다.

 

 

썰물 때는 바다가 갈라진다는 하섬입니다.

   

해안가를 따라서 마실길도 조성되어 있습니다.

 

 

 

적벽강입니다.

 여기서 변산팔경에 대하여 잠깐!!

변산8경은 다음과 같습니다. 

 

 1. 웅연조대(雄淵釣臺)-곰소 앞 웅연강에서 물고기 낚는 낚시꾼의 풍광, 경치를 일컬음.

 2. 직소폭포(直訴瀑布)-내변산의 봉래계곡에 있는 높이 22.5m의 비류폭포.

 3. 소사모종(蘇寺暮鐘)-내소사의 은은한 저녁 종소리와 울창한 전나무 숲과의 어우러짐.

 4. 월명무애(月明霧靄)-쌍선봉 중턱 월명암에서 내려다보이는 안개 낀 아침 바다의 신비로움을 일컬음.

 5. 채석범주(採石帆柱)-채석강에 있는 층암절벽의 장관과 그 아래의 푸른 바다에 돛단배를 띄우고 노니는 선유를 일컬음.

 6. 지포신경(止浦神景)-지지포에서 쌍선봉까지 산봉우리의 정경을 일컬음.

 7. 개암고적(開岩古跡)- 개암사와 우금산성·묘암골의 유서깊은 유적지와 아름다운 경치를 일컬음.

 8. 서해낙조(西海落照) -월명암 뒤의 낙조대 에서 황해 바다로 해가 지는 장엄한 장관을 일컬음.

변산이 초행이신 분은 변산팔경을 참조 하시면 좋을 듯 합니다. 

 

수성당

수성당 입니다.마침 제례를 드리는 분들이 있어 사진 촬영에 애로가 있네요.

여기 까지 구경하고

채석강(격포)에 가서 맛있는 전어회와 구이를 먹었네요.

거의 한달에 두어번씩 왔던 곳이라

지루한 면이 있어 회를 포장해 간다는 핑계로, 나들이를 마치고 집으로 귀가 합니다. 

 

 매창,유희경,직소폭포를 부안 삼절이라 하는데 

그이야기를 들어보도록 하겠습니다

 

이화우 흩날릴 제 울며 잡고 이별한 님
추풍낙엽에 저도 날 생각는가
천 리에 외로운 꿈만 오락가락 하노매

위 시조는 조선 중기 기생의 신분이었지만 대표적인 여류시인인 부안기생 매창의 연시입니다.
그녀가 평생을 두고 사랑했던 촌은 유희경이라는 이를 그리며 지은 시라고 합니다.
 

매창과 촌은 이야기 

조선시대 대표적인 여류 시인으로 평가받는 매창은 1573년(선조 6년) 부안현의 아전이던 이탕종(李湯從)의 서녀로 태어났다.
그가 태어난 해가 계유년이었기에 계생(癸生), 또는 계랑(癸娘)이라 하였으며, 향금(香今)이라는 이름도 있었다.
계생은 아버지에게서 한문을 배웠으며, 시문과 거문고를 익히며 기생이 되었는데, 이로 보아 어머니가 기생이었을 가능성이 크다.
기생이 되어 그는 천향(天香)이라는 자(字)와 매창(梅窓)이라는 호(號)를 갖게 되었다.
매창은 1590년 무렵 부안을 찾아온 시인 촌은 유희경과 만나 사귀었다.
매창도 유희경을 처음 만났을 때 시인으로 이름이 높던 그를 이미 알고 있었던 듯하다. <촌은집>에 이런 기록이 있다.

"그가 젊었을 때 부안에 놀러갔었는데, 그 고을에 계생이라는 이름난 기생이 있었다.
계생은 그가 서울에서 이름난 시인이라는 말을 듣고는 '유희경과 백대붕 가운데 어느 분이십니까?'라고 물었다.
그와 백대붕의 이름이 먼 곳까지도 알려져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그때까지 기생을 가까이 하지 않았지만 이 때 비로소 파계하였다.
그리고 서로 풍류로써 즐겼는데 매창도 시를 잘 지어 <매창집>을 남겼다."
40대 중반의 대시인 유희경과의 사랑은 18세의 매창으로 하여금 그의 시세계를 한 차원 높은 곳으로 끌어 올리게 했을 것으로 보인다.
이 무렵 그들이 사랑을 주고받은 많은 시들이 전한다.
이 고장 출신의 시인 신석정은 이매창, 유희경, 직소폭포를 가리켜 부안삼절(扶安三絶)이라고 하였다.
그러나 유희경이 서울로 돌아가고 이어 임진왜란이 일어나 이들의 재회는 기약이 없게 되었다.
유희경은 전쟁을 맞아 의병을 일으키는 등 바쁜 틈에 매창을 다시 만날 여유가 없었던 것이다.
비록 짧은 기간이었지만 진정 마음이 통했던 연인을 떠나보낸 매창은 깊은 마음의 상처를 받았다.
1607년 유희경을 다시 만난 기록이 있지만 매창은 그와 헤어진 뒤 10여년을 마음의 정을 주는 사람이 없이 유희경을 그리며 살았다.
매창은 부안읍 남쪽에 있는 봉덕리 공동묘지에 그와 동고동락했던 거문고와 함께 묻혔다.
그 뒤 지금까지 사람들은 이곳을 매창이뜸이라고 부른다. 


 

 贈醉客(취한 손님에게 드림)
                                       매창

醉客執羅衫(취한 손님이 명주저고리 옷자락을 잡으니)
羅衫隨手裂(손길을 따라 명주저고리 소리를 내며 찢어졌어라)
不惜一羅衫(명주저고리 하나쯤이야 아까울게 없지만)
但恐恩情絶(임이 주신 은정까지도 찢어졌을까 그게 두려워라)
위 오언절구 한시는 매창이 술에 취한 취객에게 쓴 한시라고 합니다.
여기서도 유희경에 대한 사랑이 절절하게 뭍어나지요??



 
自恨
                 매창

春冷補寒衣(봄날이 차서 엷은 옷을 꿰매는데)
紗窓日照時(사창에는 햇빛이 비치고 있네)
低頭信手處(머리 숙여 손길 가는 대로 맡긴 채)
珠淚滴針絲(구슬같은 눈물이 실과 바늘 적시누나)

연인을 떠나보내고 난 후 매창이 지은 한시라고 합니다.
그리움을 넘어서 서러움과 한(恨)을 드러내고 있다는군요!!


懷癸娘  
                 유희경

娘家在浪州(그대의 집은 부안에 있고)
我家住京口(나의 집은 서울에 있어)
相思不相見(그리움 사무쳐도 서로 못보고)
腸斷梧桐雨(오동나무에 비뿌릴 젠 애가 끊겨라)

유희경 또한 매창에 그리움을 표현 합니다.

 애절하기는 마찬가지군요.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