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행일시:2014년 5월 4일 일요일,비가 예보되어 날씨는 흐렸으나 산행하기 좋은 선선한 기후였음
산행여정:석포2리 대소마을입구 → 노랫재 → 병풍바위 → 운호갈림길 → 신선암 → 신선봉→ 대제장터→ 신선대터
↗↙ 갈마봉갈림길 왕복 → 사면길 → 대소골 → 대소 → 노랫재 → 석포2리 대소마을입구 원점회귀산행
산행시간:블동생 호이와 신선대터를 찾으며 여유있게 8.89km 4 시간 30분 동안 산책하듯 즐겨서 산행시간 별 의미 없음.
산행개요:내변산 중앙에 자리한 직소폭포가 있는 봉래계곡에서 절경이 빼어난 아홉 곳을 추려 봉래구곡이라 부른다.
제1곡 대소, 제2곡 직소폭포, 제3곡 분옥담, 제4곡 선녀탕, 제5곡 봉래곡을 거쳐 제9곡 암지까지 아홉 곡 명승이
2㎞에 걸쳐 펼쳐진다.이는 제1곡 대소(大沼)의 원류인 신선골 신선샘에서 발원한 물줄기가 그 始原을 이루고 있다.
내변산 최고의 절경 봉래구곡이 신선봉과 망포대가 형성한 협곡 신선골의 발원샘에서 시작된다는 이야기다.
그런데 아쉽게도 국립공원인 내변산에서 봉래구곡이 차지하는 비중이 상당한데도 불구하고 관계되는 자료를
찾아 보아도 과문의 소치인지 그 기원이랄 수 있는 신선골이 시작된 발원샘 신선샘의 위치를 찾아볼 수 없었다.
부안군청홈피등 관계기관의 자료를 검색하여 보아도 별 소득이 없고 단지 네이버백과에 나온 봉래계곡에 대한
"변산반도국립공원의 신선대 신선샘에서 발원한 계류가 직소폭포를 지나 해창으로 이어지는 계곡이다."라는
정도의 설명이 있어 '신선대'를 찾으면 신선샘의 위치를 알 수 있을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네이버지도나 산행지도에 표기된 신선대의 위치가 능선을 기준으로 신선골 반대편인 운호리쪽에 있어
이 또한 신선골 발원지 '신선샘'이 위치한다고 볼 수 없다는 생각이 들고....그러다 우연히 신선골 신선대에 살다
유신정권때 일어난 김신조의 청와대 습격사건으로 청학동으로 강제 이주된 일심교 교도들 생각이 떠올랐다.
빙고! 일심교 대부분 일반 신도들은 산아래 분지 대소골에서 살았지만 신선에 가까운 생활을 하는 지도자급은
봉우리 아래 신선대에서 살았다는 기록을 본 적이 있어, 사람이 주거지를 정할 때 제일 먼저 살피는 것이 물(水)을
구할 수 있는 우물(井)이나 샘(泉)이라 혹시 그 곳이 신선골의 발원지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어 찾아보기로 하고,
오후에 비가 예보된 날씨라 블동생 호이와 함께 아침 일찍 대소마을 입구가 있는 진서면 석포리로 길을 나선다.
'신선암에서 조망한 신선대와 신선봉'
석포2리 대소마을입구 → 노랫재 → 병풍바위 → 운호갈림길 → 신선암 → 신선봉→ 대제장터→ 신선대터
↗↙ 갈마봉갈림길 왕복 → 사면길 → 대소골 → 대소 → 노랫재 → 석포2리 대소마을입구 원점회귀산행
오늘 산행들머리 석포리 대소분지 입구를 찾아가기 위해서는 네비에 석포 2길을 입력하고 도로 끝단까지 가야한다.
즉,석포삼거리에서 내소사 방향으로 좌회전한 후 바로 보이는 석포교회에서 석포2길 도로따라 끝까지 진행하면 된다.
대소마을입구...(08:10)
여기도 비탐길이라 포장도로 끝부분에 위치한 작은 주차장은 올 때마다 텅텅 비웠는데 오늘은 차량이 서너대 주차되어 있다.
처음엔 등산객 차량인 줄 알았는데 하산길에 들른 대소분지에 새로 농원이 생겨 휴양객들이 타고온 차량이었다.
좌측은 임도따라 노랫재로 지그재그로 올라가고 바로 직등하는 산행로는 묘역 뒤에 들머리가 있다.
어, 그런데 오랫만에 왔더니 못보던 표지판이 두 개나 새로 눈에 띈다.
그동안 신선봉이나 관음봉등 대소분지 주변에 있는 산들을 산행할 때 멀리서 대소분지를 바라보면
포크레인등으로 공사를 하는 모습이 눈에 자주 띄었는데 새로이 '대소농원'이란 농장이 들어섰나 보다.
이 곳이 부안댐 물의 상수원 발원지이기 때문에 철저한 유기농 산촌으로 생태적 환경을 조성함은 당연하고...
차량도 통제하고....
등로따라 10여분 걸음하여 첫 조망암릉에 올라서고....중앙에 보이는 도로와 묘역이 산행을 시작한 초입이다.
서쪽능선엔 가야할 병풍바위가 웅태를 자랑하듯 도열하여 있다.
이후 가파른 경사의 임도를 오름하여 노랫재로 향한다.
'변산지맥'과 '내변산환종주'길이 지나는 노랫재...
오래전에 이 쌩길 수준의 임도를 4WD 애마로 올라오다 식겁을 한 기억이 있는데
지금은 시멘트로 임도정비를 잘 해놓았다.우측 묘역 앞으로는 재백이고개 가는 등로가 열려있고...
우리는 20여 미터 임도따라 대소마을로 향하다가 좌측 능선 산길로 접어들며 신선봉으로 길을 잡는다.
10 여분 넘게 가파른 오르막 뒤 병풍바위에 올라서니 발 아래 방금 전 오름한 암릉이 보이고
정면으로 석포리와 곰소만 건너 정읍 고창의 산군들이 시야에 들어온다.(08:47)
시선을 좌측 동쪽으로 돌리면 내변산의 암군이 시야에 들어오고....
오늘 산행은 신선봉 능선따라 진행하다 신선골로 내려선후 대소분지를 거쳐 노랫재로 원점회귀할 예정이다.
남쪽인 정면으로는 물이 빠져 을씨년스런 분위기의 곰소만의 갯벌이 펼쳐져 묘한 쓸쓸함을 자아낸다.
비록 비가 예보된 날씨지만 아직까지는 시야가 양호하여 곰소만 건너 고창의 산군들도 한눈에 들어오고...
곰소항....
죽도....
병풍바위 상단에서 블동생 호이를...
고도를 조금 높여서 병풍바위 상단에서 한번 더 곰소만의 풍광도 즐겨보고....
한폭의 풍경화 같은 죽도를 당겨서.....
포갠바위...(09:20)
등로가 서향에서 북서쪽으로 크게 우틀하는 지점에 위치하여 지맥을 진행하는 종주꾼들에게 이정석 역할을 한다.
운호,대소마을 갈림길이 있는 안부를 지나면서 등로는....(09:25)
암릉구간까지 오로지 조망없는 숲길을 따라야 하지만...
부드러운 그늘사초와 신록으로 물든 활엽수림으로 등로가 이어져 싱그러움을 더한다.
조망이 터지는 암릉구간...(09:40)
'구름호수마을'이란 뜻의 雲湖里가 바로 아래다.
옛이름은 '여륜계'인데 갯펄과 구름이 많은 갯마을을 뜻하는涅雲湝(열운개)에서 유래하였다 한다.
걸음한 능선을 돌아보니 노랫재에서 서향으로 치닫던 등로가 북서향으로 크게 방향을 틀었음을 알 수 있다.
평야에 외로리 자리한 두승산은 형체가 뚜렷한 반면 중앙에서 우측으로 하늘금을 이루며 뻗어나간
내장산~백암산 마루금은 형체가 불분명해 봉우리 이름을 부르기가 애매하다.
묘역이 자리한 434m봉을 오름하는데 우측으로 돌탑이 자리한 지봉이 보여 가보기로 한다.
북재를 지나 망포대갈림봉에서 봉래구곡 1곡인 대소로 바로 뻗어나간 능선 아래 중앙이 신선골이다.
신선골 끝단에 자리한 대소분지에 새로운 건물이 들어선 모습도 보인다.
이 지봉에서 능선을 자세히 살펴보니 암봉 정상에서 좌측으로 대소마을로 바로 내려서는 산행로가 있다.
대소마을에서 신선봉으로 직등하는 등로라 여겨져 다음을 기약해 본다.
옛 지명이 '대소뜸'인 대소마을은 지금은 우물 소자를 써서 大沼로 불리나 주변에 있는
내소사(來蘇寺)의 원래 자리였다는 주장에 大蘇라고 해야 한다는 주장도 있지만 이는 낭설이고,
현재 왕성하게 활동하고 있는 부안 향토사학자들은 이 일대의 지명들이 노래부르는 노릿재(노랫재),북치고 장구치는 북재(鼓峙 ),
지금은 아차봉이라 불리우는 징바위등,노랫가락과 연관된 지명이 많아 퉁소를 뜻하는 ‘大蕭’라는 말로 표기되어야 맞다고 주장한다.
묘역조망처....
운호리와 운호저수지...
운호저수지 뒤 노적봉에 가려져 보이지 않지만 우측에 관선마을이 있다.
향토사학자들 애기로는 '신선봉에는 아마도 신선이 되고자 염원했던 인간들과
이들을 이끌던 신선이 살았을 거고 그중 지도자급들만 우화등선(羽化登仙)하 듯 신선봉 주위에 살았고
일반 사람들은 산 아래 마을에서 수행하듯 살며 신선봉을 바라보던 장소가 관선(觀仙)마을이라고 한다.
신선봉을 목전에 두고 다시 암봉에 올라서니 일반 산꾼들에게 신선대로 오인 받는 돌탑봉이다.
네이버나 오래전 산행지도 표기를 보면 좌측 암봉이 신선암이고 정면 산불감시탑이 자리한 봉우리가 신선봉이다.
신선암 뒤로 암릉능선이 멋진 삼신산(갈마봉)이 보이고 그 뒤로 갑남산이 고개를 내민다.
우측으로는 저멀리 의상봉 쇠뿔바위봉 새봉 관음봉등 내변산의 주봉들이 시야에 들어온다.
당겨본 의상봉과 쇠뿔바위봉...
돌탑봉에서 신선봉으로 진행하다 조릿대숲에 이르면 좌측으로 신선암 등로가 열려있다.
등로에서 비껴서 있어 대부분 지나치지만 신선봉 최고의 조망처라 생각되기에 다녀오기를 권한다.
다녀올 생각에 걸음하였더라도 이 묘역에서 길이 막혀 돌아가기 쉽지만 살짝 숲을 헤쳐 계속 진행하면....
돌탑봉...
신선봉과 신선대....
삼신산 바람재 신선대....
삼신산과 신선봉 사이에 형성된 운호계곡에는 변산바람꽃과 복수초등 많은 진사님들이 찾는 야생화 보고다.
산불감시탑이 자리한 신선봉은 내변산에서 네 번째 높은 봉우리지만 의외로 정상 조망이 좋지 못하다.
정상에서 남서쪽 잡목을 헤치고 바로 아래 바위로 내려서서 조망을 즐겨야한다.
신선암 방향을 향해 양팔을 벌리고 심호흡 크게 하며 신선봉이 내뿜는 정기를 맘껏 들이키니 나도 신선이 된 듯하다.
신선대 건너 삼신산과 그 뒤로 갑남산능선...
신선봉, 신선대, 신선암, 쌍선봉, 선인봉, 삼신산, 선녀탕, 선인봉, 선계폭포, 관선마을...등
이렇듯 변산반도 주변에는 신선과 연게된 지명이 많은데 향토사학자들 애기로는 그 정점이 이 곳 신선봉이라고 한다.
정상에서 북서쪽으로 진행하니 등로는 우측으로 가파르게 뚝 떨어지는데
직전 바위에 올라서 걸음할 망포대 쪽을 눈에 넣어 보니 북재로 이어지는 산줄기가 시원스레 보여진다.
제 1곡 대소로 이어지는 능선 뒤로 쌍선봉도 시야에 보이고 그 뒤로 의상봉이 시야에 잡힌다.
신선봉에서 완만한 능선을 따르면 유난히 그늘사초가 무성한 숲길이 이어져 걷는 맛에 싱그러움이 더해진다.
그늘사초가 우거져 걸음하기 편한 푹신한 휠링산행로를 가볍게 걷다보면 하얀 표지기가 매인 나무가 눈에 뛸 것이다.
이 표지기가 청학동으로 이주해간 '일심교' 교도들이 거주한 옛터를 찾아가는 시그널이다.
여기와 망포대 삼각점봉 근처까지 두 곳에 표시기가 있는데 아마 지금도 남아 있는 묘역을 찾아가는 시그널로 생각된다.
머위가 지천에 널린 신선대 옛터...(11:05)
굴뚝도 보이고 규모가 상당한 것이 신선봉 아래 신선대에서 거주하였다는 '일심교'교도들의 신선대 마을터가 확실하다.
.
신선대 신선마을에 대한 거의 유일한 자료라 할 수 있는 포스팅이 있어 모셔왔다.
여러 블로그나 카페에 마치 본인의 창작글처럼 각색하거나 그대로 포스팅하여 많이 퍼져있는 자료인데,
원글은 부안 출신으로 자연생태활동가로 활동하며 현재 '부안21'을 이끌고 있는 사진작가
허철희님이 2003년도에 작성한 글이다.
청학동으로 간 신선대 사람들
6.25전쟁 후, 변산의 신선대에는
일심교 신도들이 모여들어
18가구 80여명이 마을을 이루고 살았었다.
일심교는 '유불선 동서학 합일 갱정유도'를 내세우며
세계의 모든 종교가 유교로 뭉쳐질 것을 믿는
강대성이 세운 신종교이다.
이들은 조선시대의 유교적인 생활관습을 그대로 좆아
사서삼경을 읽고,
상투, 댕기머리에 흰옷을 고집하며
신학문, 현대문명과는 담을 쌓고 살다가
1970년대 중반 무렵 지리산으로 이주해 갔다.
지금의 그 유명한 "지리산 청학동"이 바로 그 곳이다.
몇 해 전(1996년 경)까지만 해도 추석 때
신선대로 성묘 오는 그들(은재필 씨 가족)을 볼 수 있었는데
지금은 묘를 모두 이장해 가
내왕이 끊겼다.
위의 사진은 그 당시 신선대 마을 입구에서 찍은 사진으로
"뿌리깊은나무"에서 퍼왔다. 사진/김수익
글쓴이 : 허철희, 작성일 : 2003년 01월 21일 09시 26분 01초
생각대로 마을 중간에 우물터가 있고...
그 윗쪽에 폐허처럼 변했지만 지금도 물이 샘솟는 샘(泉)이 있다.
신선골 원류라고 하기에는 위치가 계곡 중간에 위치하여 조금 뭐하지만 일단 샘 하나는 찾아냈고...^^
신선들이 거주하였다고 하지만 먹고 싸는 사람들 집터는 확실하기에 점심을 드는데 똥파리들이 겁나게 달려든다.
이 곳에서 점심을 해결한 후 마을터를 구경하는데 대소분지에 거주하는 '대소도원'쥔장 일행을 만나게 되었다.
대소도원 쥔장인 조봉관씨의 설명을 들어보니 이 곳은 일심교에서 직급이 높은 분들이 거주하는 '대제장'터이고
망포대 방향으로 가보면 중간에 '신선대'터가 따로 있고, 망포대 근처에 월명암 스님들이 마시던 우물터도 있다고 한다.
일단 신선대터를 찾아가기로 하고 능선을 따르다 머위밭이 눈에 띄어 주변을 둘러보지만 여기는....아니고...^^
잠시 산세를 훓어보니 능선 근처가 아니라 골짜기 방향으로 한참을 내려가야 신선대터에 닿을 것 같아
내친김에 능선따라 삼신산으로 갈라지는 삼거리 조망바위까지만 진행하여 잠시 조망을 즐겨보기로 한다.
삼신산,망포대 삼거리....(12:50)
변산지맥은 좌측으로 이어지고 망포대는 직진길이다.
삼신산....바로 아래 안부가 야생화의 보고 바람재다.
뒤로 보이는 신선봉 아래 첫 안부가 대제장터 갈림길이고 얕은 봉우리 넘어 다음 안부가 신선대터 갈림길이다.
다시 능선을 따라 백하다 좌측 신선대터로 길을 잡는다.
신선대터...(13:07)
주철 가마솥과 화강암 절구통이 굴러다니는 신선대터에 서니
어디선가 댕기머리 휘날리며 뛰어다니는 초립동이 모습이 떠오르는 듯 하고 부뚜막에서 아낙네들 밥하는 장면이 그려진다.
이 평화로운 마을이 단순 무식하고... 무지몽매한 반공이념...등 말도 안되는 이유로 쫓겨가야 했다는 생각에 울분이 치민다.
궁금했던 우물터도 찾아내고...
김길중의 '오! 변산반도'
신선대(神仙臺)옛 터
월명암(月明庵) 뒷등 낙조대에서 西海의 망망대해를 바라보며 분초대,
망포대를 지나 북재를 넘으면 신선대(神仙台 486m) 루대(樓台)에 서게 된다.
신선들이 살아서 신선대라 하였는지...,
어쨋든 1970년대까지만 해도 두건에 도포차림으로 세상과는 아무런 미련도 없이 자기들의 방식에 의하여 구름을 벗하고
유수를 지근한 채 공․맹자의 도심(道心)이 인간 도리의 최선의 길임을 주장하며 신선처럼 살다가
무지한 속인들의 이념분쟁으로 북에서 보낸 김 신조(청와대 습격) 일당의 민간 학살사건(이용복)이 비화되어
오지인들의 보호 정책이라는 미명하에
이곳 사람들도 영문을 모른 채 자기들의 주장과는 상관없이
이 정든 삶의 터전을 빼앗기고 경상도 청학동 또는 타지로 삶의 터전을 옮겨갔다.
1977년도 경에 보안면 柳川初等學校에 근무할 당시
이곳 도인(道人)들과 가끔 교류가 있었고 서로 오고 간 정이 있었으므로
나로서는 이곳이 지금도 잊혀지지 않는 곳이다.
그래서 시간이 나면 가끔 이곳에 들려 한바퀴 옛터를 돌아보고 회상에 젖어 본다.
神仙臺 옛터
동남쪽 월태화용(月態花容)
기령(氣靈)이 운집(雲集)한 터
산수진경(山水眞景) 무릉도원(武陵桃源)
높은 터에 세워놓고
흐린 세상 취한 인간
바른 도법(道法) 깨우치려
흰 두건 도포 자락
신선(神仙)처럼 살았는데
무단한 정치(政治) 논리
백성(白姓) 보호 미명 하에
굴원이 내 몰리듯
당신들도 추방(追放)을 당했지요
초립동(草笠童) 글 읽던 도량(道場)엔
벽오동 만 쓸쓸하고
홰나무 우거진 집터
옛날 자취 완연하니
그 옛날 지인(知人)생각
왠지 마음 허전하여
산새 우는 옛 터에
아쉬운 정(情) 남겨 둔 채
반야월(半夜月) 외기러기
울며 북재(敲峙) 넘어 가듯
흐르는 계곡 따라...
해명 태명 내려왔소.
월태화용(月態花容) -달 모양 꽃 모양의 집터
무릉도원(武陵桃源)-도연명(陶淵明)이의 도화원기(桃花源記)에
기술된 선경(仙境) 무릉의 어부가 발견 하였다는 세상과
따로 떨어진 별천지
초립동(草笠童) - 풀로 만든 갓을 쓴 젊은 사내
신선대에서 邊山 小松 金吉重
신선대터에서 좌측 숲길로 길을 잡아 월명암 스님들이 탁발을 나갈 때 사용했다는
망포대 아래 우물터를 찾아가려는데 집에서 아내로부터 언제 돌아오냐는? 전화가 온다.
아범님 기일을 보내면서 갖는 형제모임을 하러 서울에 가야하는데 지금 뭐하고 있느냐는 핀잔과 함께...
아쉽지만 신선골 발원샘일 확률이 가장 높은 망포대 우물터는 다음에 찾기로 하고 우측 대소마을로 하산길을 잡는다.
완만한 숲길 따라 걷는 동안 우측으로 계속 묘역이 나타나는 것을 보니 이 등로 역시 성묘길이다.
걸음하기 좋은 숲길을 따라 기분좋게 내려서는데 발 밑에 뱀이 길게 누워있다.
인기척을 느꼈을텐데도 미동도 않고 목아래로 불룩한 모양새가 상당히 큰 먹이를 먹은 직후인 모양이다.
신선골....(13:55)
생각보다 작은 계류라 다음에는 계곡치기로 진행하여 발원샘을 찾아보아도 가능할 것 같은 생각이 든다.
계곡 옆 숲길을 따라 대소분지로 걸음하다 대제장터에서 만난 대소도원쥔장 일행을 다시 만났다.
아차봉...(14:05 )
대소분지 동쪽에 자리한 암봉으로 노랫가락과 연관있는 징바위,장구바위등으로 불리웠다고 한다.
한 때 16가구까지 살았다는 대소마을에는 이 곳이 국립공원지역으로 지정되면서 개발이 제한되어
현재는 두 가구가 살고 있는데 그 중 15 년전에 이주한 이 집 주인 모씨는 산 중 은둔자 삶을 선호하고....
현재 '대소도원'을 운영하는 조씨댁은 개발을 원하는 성향을 가지고 있다고 한다.
참고로 1954년부터 거주한 오리지널 토백이 조씨댁은 노랫재를 넘는 마을 진입로를 사비로 닦아
대소분지에서 생산한 농산물 반출을 용이하게 하는 등 대소분지에서 생활기반을 이루려고 많은 노력을 했다고 한다.
대소도원...
이 계류를 따르면 봉래구곡 1곡인 대소에 이르고 거기서부터 직소천 상류로 불리면서 직소폭포를 거쳐 부안댐으로 흘러든다.
아차봉과 관음봉....
노랫재....(14:17)
아침에 처음으로 조망을 즐겼던 조망암릉에서 배냥털이를 하며 쉼을 가지는데
대소도원 쥔장이 사륜차로 손님을 픽업하여 상당히 험하고 경사가 급한 노랫재를 넘어오는 모습이 보인다.
'무쏘의 뿔처럼 가라...'
우리나라에 사륜시대를 연 쌍용의 대표적인 사륜구동 무쏘가 힘차게 올라간다.
차체와 외관을 보니 쌍용차에서 대우차로 넘어가는 과도기에 생산된 1999년 형이다.
외관은 2000년식이지만 엔진은 독일 직수입 벤츠엔진이 장착된 마지막 오리지널 무쏘라 지금도 힘이 넘쳐난다.
문명의 이기인 차도 결국은 기계지만 그 역동적인 에너지에 고무되고...
한편으론 기계에 질 수 없다는 생각에 우리도 바위슬랩을 바로 치고 내려가기로 한다.^^
조심~조심 낑낑....^^
아침에 출발하였던 석포2리 대소마을입구에서 역사체험학습 같은 오늘 산행을 마친다.(14:20)
이 곳 역시 정식등로가 아니라 평소에는 거의 주차된 차량이 없는 곳인데 아침 이른 시각부터 차량이
다 수 있어 의아했는데 산행객이 아니라 대소농원에 놀러온 사람들 차량임을 알 게 되어 그 의문도 풀리고..
석포2리 대소마을입구 → 노랫재 → 병풍바위 → 운호갈림길 → 신선암 → 신선봉→ 대제장터→ 신선대터
↗↙ 갈마봉갈림길 왕복 → 사면길 → 대소골 → 대소 → 노랫재 → 석포2리 대소마을입구 원점회귀산행
아침 저녁으로 쌀쌀한 기운이 느껴졌던 5월초 산행기록을
바쁘다는 핑계로 팽개쳐 두었다가 무더위로 한 여름을 방불케하는 5월 말에 염치없이 올리게 됨은
오지인들의 보호 정책이라는 미명하에 정든 삶의 터전을 빼앗기고 강제로 지리산 청학동으로 이주해야 했던
신선대 도인(道人)들의 망향의 아픔이 아련하게 다가와서 입니다.
스탈린시대 러시아에서나 있음직한 강제이주라는 어처구니 없는 일이,
멀지도 않은 시기에 코메디 같은 이유로 우리나라에서도 자행되었다는 사실에
가슴이 아파오는 슬픔보다 그저 황당함을 느낍니다.
읽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지도는 대소마을이 검색되지 않아 들머리 근처 단독주택 주소를 남깁니다.
전라북도 부안군 진서면 석포2길1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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