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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북의산

우금산 백제 최후의 항거지 우금산성

산행일시:2011년 10월 23일 일요일, 날씨 흐렸지만 어느정도 조망이 허락된 가을 날씨

산행여정:개암제에주차→개암산천→305→우금산(▲331)↙↗무명암→우금암↙↗무명암→원효굴→개암사

              →탐방지원센터→개암제

산행시간:아들과 함께 4시간,산행로가 짧아 주변 무명암봉 두군데를 답사한 1시간 포함.

산행개요:금요일 회사 업무 관계로 너무 무리를 한 후 토요일 천등산에 다녀왔더니 또 늦잠을  잤나보다.

             여전히 늦잠의 달콤함을 느낀는 자신을, 아직 팔팔함을 증명해주는 것으로 자기 위안을 삼는다.

             벌써 진안 구봉산 단풍이 절정이라는 소식이 들린다. 구봉산자락에 위치한 천황사 두그루 은행나무가

             노랗게 물들면 그 광경이 볼만하기에 단풍과 연계해서 구봉산에 가려한다. 다음주에 한라산 계획이

             잡혀 있고 또한 단풍이 절정이라니 오늘밖에 시간이 없다. 아침을 대충 때우고 산행채비를 꾸리는데

             아들 녀석이 상관을 한다."아빠 오늘은 해발 몇미터짜리 산에가요?" 아직 어린애라 높이에 민감하다. 

             나도 모르게 무심코 1002m짜리 산이라고 대답을 하니 녀석이 따라 온단다. 아뿔사!후회해도 늦었다.

             구봉산은 애들이 오를 산이 아님을 잠깐 깜빡했다. 그래도 산에 같이 간다는 기특한 녀석을 떼어놓고

             갈 수가 없어 산행지를 아들에게 맞는 내변산 우금산으로 변경하고 들머리 우금산성 길이 시작되는

             개암제 근처에 있는 개암산천으로 향한다. 우금산 보다 울금바위와 우금산성,개암사로 더 알려진

             우금산은 내변산국립공원에 속하는데 최근에 개암사~만석동~감불구간이 보호구역에서 해제되었다.

             우금산성의 역사적 배후가된 백제부흥운동에 대하여 부안군청홈피는 다음과 같이 묘사하고 있다.

 

 백제부흥운동

         나·당연합군의 공격으로 660년(의자왕 20) 7월 수도인 사비성이 함락되고 의자왕이 항복하면서

           백제는 700년의 역사를 뒤로 하고 멸망하였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곳곳에서 부흥군이 일어나

           나·당연합군과 격렬한 싸움을 전개하였다. 수도 함락 직후 임존성에서는 흑치상지가 당군을 격퇴시키고

           2백여개의 성을 회복하였으며 복신(福信)과 도침(道琛)이 왜에 있던 부여풍을 왕으로 옹립하고

           공격을 활발히 전개하여 한때 수도 사비성 함락을 눈앞에 둘 정도로 세력을 넓혔다.

           또한 신라군이 금강을 통해서 웅진(熊津:지금의 공주)과 사비(지금의 부여)로 식량을 운반하는 통로를 끊어

           나·당연합군을 궁지에 몰아넣기도 하였다. 백제부흥군의 계속된 투쟁으로 어려움에 처한 유인궤는

           유인원(劉仁願)의 군대와 합세하여 공격하였지만 큰 타격을 입었고 결국 당나라 황제에게 요청하여

           신라군의 지원을 받았으나 역시 크게 패하였다. 하지만 이 때 백제군의 상승세를 막는 사건이 발생한다.

           즉 부흥군 지도층 사이에 내분이 발생하여 복신이 도침을 죽이고, 휘하 군사를 거의 장악하여

           부여풍마저 제거하려다가 부여풍에게 살해당한 것이다. 이에 당군은 내분의 기미를 알아채고

           부흥군에 대한 공격을 개시하였다. 특히 663년(부여풍 3) 동아시아 최대의 해전이었던 백강전투에서

           부흥군과 왜의 구원병이 크게 패하면서 구심점을 잃은 부흥군은 사기가 꺾였고, 부여풍마저 고구려로

           망명하면서 주류성은 힘없이 함락되었다. 한편 북부의 거점인 임존성만은 지수신에 의해 지켜지고

           있었으나, 주류성 함락과 동시에 대부분의 성읍들이 항복하였으므로 임존성은 고립무원의 처지에 놓이게

           되었고 이에 당군은 성을 직접 공격하지 않고 항복한 백제군을 동원하여 공격해 663년(부여풍 3) 말 임존성을

           함락시켰다. 이로써 4년여에 걸친 백제부흥운동은 대단원의 막을 내렸다.<부안군청>

 

 

개암제 주차→개암산천→305→우금산(▲331)↙↗무명암→우금암↙↗무명암→원효굴→개암사

                       →탐방지원센터→개암제

 

 

부안에서 흥덕가는 23번국도 봉은삼거리에서 개암사방향으로 우회전하여 1km정도 가면 개암제에 도착합니다.

 

개암제(개암저수지) 뒤로 울금바위(우금바위)가 자태를 드러내고 있네요.

 

 

    개암제초입에 설치된 휴게의자에 아들녀석과 배낭을 내려놓고, 개암사 도착 2/3정도 되는 지점에 있는 묘역 공터에

주차한 후, 다시 산행들머리 개암산천이 위치한 개암저수지 초입으로 걸어갑니다.

 

개암산천 입구 좌측 기슭이 들머리입니다.

 

산행초입은 평야지대에 있는 산들이 늘 그렇듯이 빡세게 경사가 급합니다.

10분정도 오르면 서서히 땀이나고 겉옷을 벗어야겠다는 생각이 들때쯤 바위군이 나타나 옷정리를 합니다.

 

겉옷을 벗은후 오분쯤 더 오르면 ㄷ자형바위가 나타나는데 역시 남자애답게

멧돼지 사냥의 최적의 장소라고 사냥 흉내 제스처를 취하네요.

멧돼지가 너를 잡겠다.녀석아!

 

 

삼년전에 제암 저수지가 움푹 들어간 부근 묘련골 입구로해서 이 묘역으로 올랐던 기억이 나네요.

 지금은 샛길출입금지로 막아 놓아 잡풀만 무성해졌습니다.

 

가족산행지로 최적의 장소가 아닐까 생각됩니다.우금바위까지 편안한 숲길이 이어집니다.

 

그동안 작은 봉우리들을 두개 지났지만 제대로된 첫봉우리 306봉입니다.

 

백제최후의 저항지인 우금산성이 서서히 니타나기 시작합니다.

좌측 우암산 정상과 가는골저수지 뒤로 어수대가 보이네요.

 

우암바위 가는길에 억새밭도 있답니다.

본격적인 우금산성이 나타나기 시작합니다.

                 우금산성은 660년 백제 의자왕이 부여를 빼앗겨 연합군에 투항하고 나당 연합군에 의해 멸망하자,

                 백제 광복군이 왕자 "부여풍" 을 받들어 최후 항전을 벌였던 역사적 현장으로 전하고 있다.

                 이 성은 양 능선을 따라 동서로 연장되었으며 남변의 길이는 수구에서 동측선이 563m로 우금암까지,

                 서측선은 675m, 계 1,238m에 이르며, 동변은 1,100m이고 북변은 830m, 서변은 838m로서 평면은

                 북변이 좁고 남변이 넓은 사다리꼴을 이루는 형태를 하고 있다. 울금바위 정상에서는 드넓은 호남평야

                 서해바다가 시원스럽게 내려다보인다.

 

산성위에서 아들녀석 신나게 웃으며 폼을 잡네요.

뒤로 보이는 암봉이 자료 어디에도 언급된 곳이 없어 이름도 모르지만 산행중 제일 멋있는 암봉같아 올라 보았습니다.

 

산성위 바위에서 우금바위를 바라보는 아들녀석은 지금 무슨 생각을 할까요?

 

걸어온 능선을 뒤돌아 보고 담아 봤습니다.

 

정상에 올라 포효하는 아들녀석

묘련재를 지나 우금바위로 가는 소나무 숲길이 근사하답니다.

오늘 산행최고의 비경인 무명암봉으로 가보기로 하고 산행로를 이탈합니다.

 

너덜길 산성을 조심스럽게 내려가서 어렵게 암봉으로 올라가 보았더니

 

세상에!무명암봉위에 덩그렁이 陽城李公묘역이 있네요. 자손들 무지 잘되었을 것 같습니다.

어수대와 작은골저수지가 가장 가깝게 보입니다.

다시 우금암을 향해 발길을 돌립니다.

 

우금산정상쪽도 한번 뒤돌아 봤습니다.

 

근래에 가장 아름다운 숲길로 여겨지는 우금산정상에서 우금바위 가는 숲길입니다.

 

책바위라 이름 지을까요?

 

 

우금바위 직전 모련재입니다

 

우금바위 좌측으로 돌아가면 바위사이로 우금바위를 올라갈 수 있지만 아들녀석에게

너무 위험하여 포기하고 우측으로 베틀굴을 찾아갑니다,

 

복신이 병사들의 옷을 지어 입히기 위해서 베를 짰다는 베틀굴입니다.

 

베틀굴 앞에서 폼한번 더 잡아보고요.

우금암을 보기위하여 옆에 우뚝 서있는 무명 암봉으로 향합니다.

아버지가 말리지는 못하고 방조를 했읍니다.

우금바위옆 서쪽 암봉으로 오르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이 샛길을 지나 낙엽이 잔뜩 깔린 급사면을 올라가야 합니다.

 

우금바위를 제일 가깝게 조망하는 암봉으로 올라가기 위해,샛길을 어쩔 수 없이 올랐습니다.

아들녀석 뒤에 보이는 암봉이 우금암입니다.

 

다시 우금바위로 돌아와서 대나무 사이를 지나면 원효굴이 나타납니다

 

원효굴입니다.복신이 병사들을 훈련 시켰다는 굴이라고 하는데 사실은

원효대사가 676년에 나라잃고 실의에 빠져있는 이곳 주민들을 위무하고자  머물렀다고 합니다.

 

원효굴 바로 아래에 우금산성에 관한 설명문과 이정목이 처음으로 보이네요.

 

우금바위 아래에서 우측으로 돌아가면 사람이 살았던 흔적이 보이고

바위쪽으로 접근금지 샛길을 지나 좀더 위로 가면 바위에 사람이 지나다닌 흔적이 보이고 흔적을 따라가면 

쇠창살이 설치된 것으로 보아 사람이 살았던 모양입니다.

 

우금암에서 700미터 내려오면 개암사에 도착합니다.

 

이번 2011년 5월달에 새로 개방된 구역인데 임도로 구성되어 있어 발길이 뜸하다고 하네요.

대웅전뒤로 우금암이 보이네요.

혹시 개암죽염의 발상지가 여기 개암사라는 것 알고 계셨나요? 

  이 절은 백제무왕 35년(634년)에 묘련왕사가 변한에 있는 궁전을 절로 고쳐 지을 때 묘암의 궁전을 묘암사,
  개암의 궁전을 개암사라 부른데서 비롯되었다. 40여년 후인 통일신라 문무왕 16년(676년)에 원효대사와
  의상대사가 이곳에 들어와 절을 다시 지었다고 전해지고 있다. 고려 충숙왕(1313년)때에는 원감국사가
  순천 송광사에서 이곳으로 들어와 중창하면서 황금전, 청련각, 청허루등 30여동을 지어 큰 사찰이 되었다고
  한다. 현재는 대웅보전, 응진전, 월성대, 요사채가 있어 한적한 편이다. 대웅전 오른쪽 새로 지은 요사를 둘러싼
          대나무가지 울타리와 갈대는 입구의 단풍길과 함께 개암사의 고요한 멋을 더해준다. 보물 제 292호로 지정된

          대웅전은 정면 3간, 측면3간의 팔작지붕으로 조선시대 초기의 건축양식을 보여주고 있다.

 

개암사입구 불이교에서 한컷 주변에 녹차를 많이 재배하고 있습니다.

 

월정약수쪽으로 체육공원과 주차장 시설을 깔끔하게 정비하였더군요.

 

와!이 은행나무 보니까 오늘 못 간 구봉산 천황사 은행나무가 다시 떠오르네요.

어떻길래 난리냐고 하시는 분들을 위해서 다른분 사진이라도 올려드립니다.

 

 

 

 너무 멋있어 받아 놓았는데 출처를 까먹었습니다.원작자님께 죄송합니다.

 

 

제아들녀석이지만 속에 뭐가? 들었나 저도 모르겠습니다. 

 

차를 주차해 놓은 개암저수지옆 묘역 공터에서 간식으로 컵라면과 김밥을 맛있게 먹었습니다.

 

개암산천(13:10)~306봉(14:10)~우암산정상(14:35)~우암바위(15:30)~개암사(16:25)~개암저수지(17:10) 총 4시간

 

개암사위치 다음지도

 

 

읽어 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