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한국의산

비내리는 지리산~♬, 거림에서 중산리로...

산행일시:2012년 9월9일 일요일, 날씨 하루종일 비

산행여정:거림탐방지원센터 → 세석대피소 → 촛대봉 → 연하봉 → 삼신봉 → 장터목대피소 → 제석봉

             천왕봉(▲1915m) → 법계사 → 합수점 → 중산리탐방지원센타 → 주차장,총 18km

산행시간:익산두리산악회를 따라서 산우 조기철씨와 둘이 하루종일 비 맞으며 7시간 40분

산행개요:현성산을 가는 산악회 버스안에서 건너편 자리에서 지리산산행에 대한 이야기가 들려온다.

             지리산종주산행을 한 후 이주가 지났지만 들려오는 지리산 이야기에 순간 귀가 솔깃해진다.

             다음주 중산리를 기점으로 한 지리산 산행을 계획하였는데 하산로를 아직 정하지 못하였단다.

             일단 천왕봉 고전 코스인 중산리~천왕봉~백무동은 아니라는 애기에 선뜻 신청을 하였다.

             대원사로 내려와도 좋고, 거림으로 내려와도 좋고, 혹시 금지된 칠선쪽이면 더 좋고...!!

 

             코스를 몰라도 지리산이라 무조건 가기로 하고 평소 자주 산행에 동행하는 조기철씨와 함께

             새벽에 부푼꿈을 안고 지리산산행에 나섰는데 황당하게도 산행을 막 시작하니 비가 내린다.

             이넘의 비가 쏟아지는 것도 아니고 이슬비로 하루종일 내리니 조망이 제로인 산행이 되었다.

             쏟아지는 비라면 개인후 멋진 운해를 기대해 볼수도 있지만 이슬비로 하루종일 내리니....

             그렇지만 우중산행이라도 지리산은 지리산이라 산행시 느끼는 감흥은 즐거움 그자체였다.

 

 

 

 

      오늘 지리산이 유일하게  허락한 운해...

 

 

 

 

               거림탐방지원센터 → 세석대피소 → 촛대봉 → 연하봉 → 삼신봉 → 장터목대피소 → 제석봉

 

            천왕봉(▲1915m) → 법계사 → 합수점 → 중산리탐방지원센타 → 주차장,총 18km

 

 

 

    비록 이슬비가 내리지만 지리산으로 향하는 마음은 언제나 설레인다.(09:10)

    도장골로 갈라지는 길상암갈림길에서 우리는 세석대피소 방향으로 향하고...

    세석대피소까지 거리가 6km인데  세석가는 가장 빠르고 정비가 잘된 등산로로 알려져있다. 

 

 

 

    고도가 1008m인 지점에 세워진 다리라 해서 천팔교라고...

 

 

      북해도교는 이지형 기후가 추운 일본 북해도와 같은 특성이 나타나서 북해도교라 명명하였단다.

     오늘은 비때문에 빨리 찍으려고 하다가 흔들린 사진이 많다.

 

 

 

    오늘 지리산산행기는 날씨 영향으로 보여줄 사진이 없어 심심한 산행기가 될 모양이다.

    그런데 거림골이 지리산 빨치산의 주활동지였던 관계로 최후의 빨치산 정순덕이야기가 딱 생각난다. 

    무료한 산행기를 대신하여 최후의 빨치산 정순덕의 일대기를 올려본다.

   

    이곳 거림골은 지리산 남부능선과 더불어 빨치산의 주활동지였다.  

    특히 거림골에서 가지를 친 도장골과 자빠진골은 이영회와 최후의 빨치산으로 

    알려진 정순덕이 활동한 지역으로 1951년 까지는 빨치산 안전지대로 인정되었다.

    

   다음은 최후의 빨치산 정순덕의 자술서 형식의 진술기록이다. 

 

마지막 빨치산 고 정순덕의 진술기록.

나는 1933년 6월20일(음력) 아버지 정주삼씨와 어머니 진도원씨의
1남4녀 가운데 둘째 딸로 경남 산청군 삼장면 내원리에서 태어났다.

우리 마을은 하늘과 구름 그리고 산이 마주 닿는 곳.
해발 800m 하늘아래 첫동네로 9가구가 살던 곳이다.
아버지는 평범한 촌부, 어머니는 전형적인 시골 아낙네.

나 역시 여느 산골 아이들과 다름없이 자랐으나
극심한 가난에서 벗어나려고 선머슴처럼 일했다.
평온했던 우리 마을에 먹구름이 끼기 시작한 것은
내 나이가 열 다섯살 때이던 해인 1949년 부터였다.

좌익이니.. 우익이니.. 하는 말들이 들려오더니만
어느날 반란군들이라는 사람들이 마을로 들어왔다.


하지만 그들은 의외로 거칠거나 험악하게 굴지 않았다.

우리집에서도 밥을 해먹거나 해달라며 돈을 내놓기도 했다.



그러다 그해 봄이던가?



안내원 마을 주민들은 고향을 떠나라는 소개령.

반란군을 소탕한다며 산 아래로 대피하라는 명령



삶의 터전을 잃어버린 마을 사람들

조상 대대로 살던 동네에서 쫓겨났다.

우리집은 면소재지의 방 한칸에서 살았다.

다행히 그곳 대하리에 고모집이 있었기 때문.



하루 아침에 황망한 꼴을 당한 우리 가족

암소 두마리로 고모네 논을 부치며 살았다.

그리고, 얼마 후 다시 집을 마련할 수 있었다.



그러다가 나는 1950년 5월 만 16 나이로 결혼했다.

근처 마을에 성씨 집안의 장남 성석조씨가 나의 남편,

그당시 처음 만난 17살 남편에게 시집갈 수 밖에 없었다.



일찍 시집을 가게 된 이유는 단순했다.

넉넉지 못한 살림에 흉년이 3년 겹친 탓.

입이라도 하나 덜어야 할 형편이었기 때문.

 
   

남편은 나를 참으로 따뜻이 대해 주었다.

남편은 내가 시집가기 몇해 전 돌림병으로

부모님을 한꺼번에 여의고 농사일을 하면서

3살, 6살, 11살 동생들을 돌보는 외로운 사람.



어른들의 조언도 들을 수 없었던 남편은

어린 나이에 순전히 자신의 판단으로 전쟁 직후

인민군 점령 하에서 몇달 동안 '민족 애국 청년단'

그 단체에 가입하여 활동하며 부역행위를 했다.



이것이 남편뿐 아니라 내 인생을 바꿔놓은 계기가 되었다.

인민군은 얼마 못가 철수하고 나자 남편은 빨갱이로 몰렸다.

남편은 당분간 산에 들어가 있어야겠다며 지리산으로 떠났다.

남편이 산으로 들어간 뒤 국군과 경찰이 잇따라 마을로 들어왔다.



그 다음 일어난 일은 불을 보듯 자명했다.

"빨갱이 남편을 찾아오라."는 위협과 폭행

시동생들을 맡았던 나는 변명 한번 못했다.



시도 때도 없이 토벌대가 찾아와 총 개머리판과 몽둥이로

어깨가 빠지는 등 온몸에 성한 곳이 없을 만큼 마구 때렸다.

상상도 못했던 일이라 나는 두려움과 고통을 이길 수 없었다.



1950년 11월 근처에 살던 숙모에게 몸을 피해야겠다고 전한 뒤

약간의 식량을 이고 일주일간 피신했다가 지리산으로 들어갔다.

남편을 찾아 잠시 몸을 피하려고 들어간 지리산 골짜기에서 13년.



빨치산이란 이름으로 생활을 하게 될 줄은

나 자신이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던 일이다.



나는 빨치산 부대에서 허드렛일을 하다가 얼마 후 취사부에 들어갔다.

거기서 꿈에 그리던 남편을 만났고 입산이 죄라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전쟁이 끝나면 모든 것이 해결될 줄 알았지만 시간이 가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던 어느날, 1952년 1월 토벌대의 2차 대공세(일명 대성골 천불사건)

지리산에 흩어져 있던 빨치산들이 토벌대 공세에 쫓겨 대성골로 몰려왔다.

토끼몰이 하듯 우리를 몰아넣은 토벌대는 B2 폭격기로 비오듯 포격을 시작



2주간 계속된 공격으로 산속은 온통 불바다

대성골의 빨치산들은 거의 사살되거나 잡혔다.



빨치산은 세번 죽는다는 말이 있다.

‘총맞아 죽고, 굶어 죽고, 얼어 죽는다’



당시 나는 엄동설한에 혼자 바위틈에서 아무것도 먹지 못한 채

일주일 동안 숨어 지내야 했던 극한 상황에서 이 말을 실감했다.



이 공격에서 나는 살아 남았지만 난리통에 헤어졌던 남편은 죽었다.

그 전까지 밥이나 빨래 허드레일을 하거나 환자간호를 하며 지냈다.

그러나 그 후 나는 본격적인 군사훈련을 받고 정식 전투원이 되었다.



군경 토벌대와 전투가 벌어질 때마다

희생자가 늘었고 빨치산은 위축되었다.



그 와중에 산간지대 주민들도 토벌대에 끌려가 억울한 죽음을 당했다.

또 빨치산 내부에 불만을 품고 토벌대에 자수한 고위 간부들도 있었다.

그들이 토벌대를 데리고 오는 바람에 보급이 끊기고 비트가 기습당했다.



날이 갈수록 운신할 수 있는 폭이 점점 좁아졌다.

정전 이듬해인 1954년 모두 7명 남았던 여자 빨치산.

그 중 한명이 귀순하며 나머지 6명도 신분이 알려졌다.



그후로는 주변의 친척들까지 경찰에 시달렸다.

1954년 말 이은조와 이홍희 나 3인의 여성 빨치산.

이때부터 셋이서 최후의 빨치산 생활이 시작되었다.



 

그해 추운 겨울을 지리산 속에서 넘기기란 쉽지 않았다.

1955년 한해 동안 전북 장수와 무주 덕유산 기백산 월봉산

이 산에서 저 산으로 살아남기 위해 옮겨다니는 신세가 되었다.



우리가 동에서 번쩍, 서에서 번쩍한다는 소문이 나돌기도 했다.

1956년 지리산으로 돌아간 우리는 토벌군 포위망을 뚫지 못하고 고립



식량을 얻기 위해 친척집을 찾고싶어도

친척에게 화가 될까 두려워 갈 수 없었다.



1960년 정부의 통제가 조금씩 느슨해지기 시작했는데

이때 과거 협조적이던 사람들에게 조금씩 도움 받았다.



하지만, 1961년 겨울 매복 나온 토벌대의 기습으로

총격전 도중에 여자 빨치산 동료였던 이은조를 잃었고

언제 토벌대가 들이닥칠지 모르는 불안한 상황이 계속됐다.



1963년, 경찰은 우리의 정보원이던 나의 먼친척을 위협하고 회유

11월에 접선할 정보를 알고 치밀한 작전을 세우고 우리를 기다렸다.

그 사실을 까맣게 모른 채 그 집에 들렀던 우리는 경찰에게 포위되었다.

동료 이홍희는 사살 당했고 나는 오른쪽 다리에 총상을 입고 체포되었다.



이로써 지리산의 빨치산은 모두 사라졌고

나의 13년 지리산 속에서의 생활도 끝났다.



고 정순덕의 생애



1933년 경남 산청군 삼장면 매월리에서 출생.

1950년 경남 산청군 시천면 출신 성석조씨와 열여섯에 결혼.

 그해 9월 남편을 찾아 지리산에 입산.

1951년∼1953년 지리산 진양군 유격대 편입.

 남편 마지막으로 만남.(1952년 남편 전사 확인)

 노영호 부대에 편입 덕유산으로 옮김(1953년)

1963년 13년간 지리산 빨치산 활동 중 지리산 내원골에서 마지막 빨치산으로 체포 됨.

 산청경찰서 경찰과의 총격 중 다리에 총상을 입고 오른쪽 다리 절단.

 무기징역 선고받고 대구, 공주, 대전교도소 등에서 23년간 투옥.

1985년 8.15 특사로 가석방된 뒤 음성 꽃동네에서 생활

1988년∼1995년 자립을 위해 꽃동네에서 나옴.

 부산 가죽공장, 서울 가구공장, 구로동 양복걸이 공장 등지에서 노동하며 삶.

1995년 비전향장기수들의 거처인 낙성대 ‘만남의 집’에 정착.

1999년 뇌출혈로 쓰러져 뇌수술을 받고 왼쪽 마비. 인천 나사렛 한방병원에서 한방치료.

2000년 비전향장기수 1차 송환요구 했으나 당국의 거부로 무산.

2001년 ‘전향 무효’ 선언하며 2차 송환 촉구.

2004년4 1일 향년 70세로 별세.


 

    이슬비가 내리는 중이라 주위에 구름이 잔뜩 껴 기록할 사진이 없다.

   그렇게 앞사람 엉덩이만 보면서 천왕봉까지 가던중 딱 한번 하늘을 보여주는데

   이곳 삼천포 조망대에서 아주 잠깐 하늘을 보여준다.(10:47)

 

 

 

     좌측으로 외삼신봉 중앙삼신봉 오른쪽 구름사이 고봉이 내삼신봉이다 .

 

 

 

    이름없는 다리 두개를 더 지나고 나니 세석교가...

   비가 오는 영향인지 세석대피소까지 우측으로 계곡물소리는 계속 따라온다.

 

 

 

     의신마을에서 오는 합수점을 지나면서 점점 진한 운무가 시야를 가린다.

 

 

 

    습지위에 데크보행발판이 있는 걸로 보아 세석평전에 다와가는 모양이다.

 

 

 

    진한 운무속에 가려졌지만 그 아름다움은 숨길 수 없는 모양이다.

 

 

 

    세석대피소 음수대,

 

 

 

    진한 운무속에 세석대피소...

 

 

 

     오늘 같이 한 일행들과 시원하게 한잔 들이키고..

 

 

 

    세석대피소는 비가 오는 중이라 사람들이 너무 붐벼 장터목에서 점심을 하기로 하고 통과한다.(11:15)

 

 

 

     선두조 산행대장님을 세석평전에서 만나고...

 

 

      구름에 싸인 촛대봉에 오르는데...

 

 

 

    구름속에 잠긴 촛대봉이지만 인증샷을 남기고...

 

 

 

     촛대봉과 연하봉사이에 있는 삼신봉을 오르는데 여전히 이슬비에 시야가 제로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삼신봉에서 바라 보는 연하선경의 아름다움을 기대하며 올라보지만...

 

 

 

     삼신봉에 올라서니 빗줄기가 더욱 거세지며 겨우 주변만 시야에 들어온다.

 

 

 

     연하봉 오름길

 

 

    오늘 산행을 같이 한 분들인데 두분이 아주 다정하게 국민학교 단짝 친구같이 산행을 한다.

    연하봉에서 부터 사진을 찍었는데 너무 다정한 포즈를 취하셔서 어릴적 단짝 친구 같다.

 

 

 

    여기서도...비록 흰머리는 보이지만 마음만은 새파란 청춘이다...!!

 

 

 

     옛날 장이 섰다는 장터목대피소에서 동행한 일행들 단체샷...(12:50)

 

 

      엽서를 보내면 일년뒤에 배달된다는 빨간우체통 앞에서...

 

 

 

    너무 붐비는 장터목대피소에서 간단히 점심을 해결하고 바로 제석봉으로 향한다.

 

 

 

    제석봉 고사목지대에 도착하니 비바람이 심하게 불어댄다.

 

 

 

     이제는 고사목도 거의 없어져 간다.

 

 

     시야가 제한되니 그저 앞으로 진행을 하는데 의미를 두고 산행을 한다.

     통천문에서 산우 조기철씨...

 

 

 

              천왕봉(▲1915m)정상석

 

 

       천왕봉 정상에서 조기철씨 인증샷을 남기고..(14:10)

 

 

      뿌연 연무에 시야는 제로지만 분주하게 정상인증샷을 남기는 산님들...

 

 

       중봉방향 하산로에서 한무리의 산님들이 요란한 휴식을 갖길래 보았더니

     동행한 익산두리산악회 B코스 타신분들이다.

 

 

 

        정해수  백제산악회 전회장님도 계셨군요.

 

 

                  법계사를 거치는 중산리 하산로는 처음부터 급경사 돌계단길과 데크계단으로 시작된다.

 

 

 

     하산중 조망처가 보이길래 혹시나 하는 마음에....??  역시나 시야가 꽝이다.!!

 

 

 

     개선문을 지나고...

 

 

      드디어 한차례 잠깐 시야가 터지고 운해를 보여준다.

 

 

       비록 잠깐이지만 갑갑한 시야가 터지니 그저 감사할 따름이다.

 

 

 

       법계사 일주문에 도착하여 하산시간에 맞추기 위하여 바로 하산을 한다.(15:15)

 

 

    음수대가 있지만 목이 마렵지 않아 지나치려는데 안내문구가 발길을 잡는다.

    현대판 봉이 김선달이 출현하였다. 원래 남의 돈 가지고 장사하는 곳이 은행이라지만

    플라스틱바가지 몇 개 걸어놓고 샘물을 선물한단다. 자연의 산물을 가지고 인심을 써도 너무 쓴다.

 

 

     망바위를 지나고...

 

      장터목에서 하산하는 길과 만나는 합수점에 도착한다.

     여전히 이슬비는 줄기차게 내리고...

 

 

     장터목에서 헤어졌던 단짝분들을 칼바위에서 다시 만났다.

 

 

      어느덧 중산리탐방지원센타에 도착하였으나 대형버스주차장은 여기서 1.5km를 더 걸어가야한다.

    거림~천왕봉~중산리 코스가 탐방안내서에는 16.5km로 나와있으나 실제 주차장까지 거리는 18km이다. 

 

 

 

        중산리계곡

 

 

         대형주차장 근처 그림같은 전원주택단지가 인상적으로 보여서...

      하루종일 비를 맞으며 조망없는 산행을 하였지만 지리산은 지리산이라 역시 즐거운 산행이었습니다.

 

 

      거림(09:10) → 세석대피소 (11:15)→ 촛대봉 → 연하봉 → 삼신봉 → 장터목대피소(12:50) → 제석봉

      천왕봉(▲1915m) (14:10) → 법계사(15:15) → 합수점 → 중산리탐방지원센타 → 대형주차장(16:50) 7시간 40분

 

13

 

읽어 주셔서 감사합니다.